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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붕이들은 한국전 참전 용사의 기념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작가의 이야기를 커뮤에서나 TV프로그램에서나 본적이 있을거야.
라미 현 이란 분인데..
그 분이 참전 용사들과 이야기한 내용은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개붕이들의 상식과 대체로 일치할거임.
1. 한국 전쟁은 유엔군이 참전을 결정한 사례로 북한의 행동을 ‘침략행위’라고 규정했었음. 물론 당시 상임 이사국인 소련이 불참했던 결과고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또 한국전 이전의 휴전선 분쟁과 차원이 다른 전면적인 침공을 한건 북한이 맞으니. 유엔의 결정은 옳았지.
2. 그런데 여러가지 사유로 냉전과 관계되어서 그런지 각국에서는 파병을 하고도 참전 용사들에게 대우가 소홀했다는 경향이 있음.
미국 같은 경우에도 오죽하면 `잊혀진 전쟁`이란 표현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무관심 했음. 한국이 어딘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서구권사람들에게 악의축인 히틀러와 추축국이 선명한 인상인 2차대전과 달리 냉전의 일부였던 한국전은 아무래도 이해가 안되었을 테니까.
그런데. 라미 현 작가의 책을 보다 보니까, 무관심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모욕적일 정도의 경험을 자국에서 하신 참전 용사분이 계시더라고.
참전 기록 자체를 공식적으로 부정당하는 수준의 경험이었음.
베트남전 직후의 미군도 민간인들에게 모욕을 당할 지언정, 정부가 그런적은 없었거든.
네덜란드의 Herman van der Leelie (헤르만 반 데 릴리) 선생님.
라미현 작가가 찍은 사진들이야.
헤르만 선생님이 아들과 함꼐 찍은 사진.
나는 라미현 작가의 책에서 읽었는데, 마침 국방부 블로그에 올라와 있어서 소개할께..
(밑줄하고 볼드 처리는 내가 한거임)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mnd9090&logNo=222003973754
"(중략)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유를 물어보니, 매우 긴 이야기라고 하시며 말씀을 시작하셨다.
1944년부터 1947년까지 3년 동안 인도네시아의 포로 캠프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 당시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이 전세를 확장하면서 인도네시아를 점령했다. 무슨 이유로 그곳에 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풀려나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온 것이 1947년이라고 한다.
그 당시 열다섯 살이었던 그는 포로수용소에 있는 동안 학교를 다니지 못해, 네덜란드 학교 1st class(우리로 치면 초등학교 1학년)으로 들어가야 했고, 소년에서 남자로 변해가고 있는 그에게는 작은 책상에 몸이 꽉 껴서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더욱더 힘든 것은 학교 선생님들이었는데, 당시 네덜란드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에서 온 자국민들을 경멸했다고 한다. 그들이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괴롭혔다고 생각해서인지, 그와 그의 여동생을 심하게 매질하고, 혼내며 학대했다고 했다. 그 상황이 너무 심해지자 더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기에 뛰쳐나왔고, 변변한 학교 졸업장 없이는 할 수 있는 일들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먹고살기 위해 그는 겨우 열일곱 살에 네덜란드 해군에 입대했다. 1년을 남아프리카에서, 1년을 남미에서 그리고 다시 1년을 캐나다 킹스턴 등지에서 보내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그때 같이 어울려 다니던 전우가 존 블루밍(Jon bluming)이었다고 한다.
(존 블루밍 네덜란드 한국전쟁 참전용사, 무술가로 유명하다.)
1950년 후반의 어느 날, 존이 물었다.
‘저 멀리 동양에 한국이란 나라에서 전쟁이 났다는데, 우리 거기 참전해보지 않을래?’
21살이었던 하먼 선생님은 일단 ‘아버지랑 상의 좀 해볼게’ 라고 했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더니 단칼에 ‘잘 다녀와~’ 라며 매우 쿨하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직도 아버지의 그 모습이 생각난다고 웃으면서 얘기하셨다.
21살에 다시 네덜란드 육군으로 자원하여 코만도(Commando) 훈련을 받은 뒤 3주간의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코만도는 군대에서 특정한 대상을 재빠르게 습격하기 위해 편성되는 특수부대이다. 이들은 빠른 기동성을 지니며 경무장하여 기습 침투를 주 임무로 한다.)
같이 갔던 전우들은 낯선 분위기에 잔뜩 긴장했지만, 그는 열일곱 살부터 전 세계를 돌아다녔기에 여러 문화에 익숙했고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일본문화도 많이 접했기에 한국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응하는 문제와는 달리 한국에서의 기억은 끔찍했다고 말했다. 극한의 더위와 추위, 폭우와 수많은 전투의 기억들로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는 북한의 쉐러본이란 곳에서 전투를 했다고 기억한다.(비슷한 이름의 지명을 찾아보았으나 알아내지 못했다.) 그 당시 COPs(combat outposts) 전진 초소에서 근무하면서 중공군과 북한군의 위협에 긴장하고 있었는데, 가장 많이 화가 나는 일은 식량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전쟁 중이라 네덜란드 음식은 고사하고 미국이 제공하는 전투 식량이라도 감사히 먹어야 했다. 초콜릿과 껌까지 들어 있는 미군 전투식량은 나름 좋았다고 하셨다. 본부에서 일주일치 분량을 차로 전달해 주는데, 그것을 안 중공군/북한군이 종종 공격했다는 것이다. 높은 진지에 있기에 밥차가 오는 것이 보이는데, 한 번은 적군이 그 길에 대고 수백 발의 박격포탄을 쏘아 이리저리 피하는 밥차를 명중시키고 말았다. 훨훨 타오르는 밥차를 바라보면서, 분노하며 다음 식량 보급까지 일주일가량을 굶은 채로 버텼다고 한다.
어느 날 전투 중 수많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박격포가 머리 위로 날아갔는데, 그중 하나가 아주 가까이 그의 옆에 떨어지면서 폭발 반동으로 몸이 튕겨 나갔다. 그때 사건으로 한쪽 귀가 거의 안 들리고, 왼팔에 수십 개의 파편이 박히는 상처를 입으셨다. 그리고 그 당시에 모든 파편을 다 제거할 수 없었기에, 그냥 일부를 놔두었다가 10년 뒤에 제거하셨다고 한다. 파편을 제거하고 나니 팔이 좀 가벼워진 것 같다는 농담도 하셨다.
그 뒤로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 감시하는 일을 했는데, 수만 명의 포로를 몇 안 되는 군인이 지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하셨다. 그러던 중 미군 장성이 거꾸로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잡히는 일이 생겼는데, 난리 끝에 풀려났지만 어깨에 붙은 별을 북한군 포로에게 뜯겨 빼앗겨버렸다. 결국 그 사건 이후 포로수용소의 병력이 더 늘긴 했지만, 여전히 힘들었다고 한다.
1952년 미 2사단 인디언헤드 부대에서 근무하는 선생님(한국전쟁 당시)
1953년 휴전 협정 후 네덜란드로 귀국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환영이 아니라 비난이었다. 항구에 ‘동양에서 돌아온 살인자, 그곳에서 죽지 왜 돌아왔냐’ 는 피켓을 든 성난 네덜란드 국민들이 서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했을 때 네덜란드군의 일부가 나치에 협조했기에 국민들에게는 군을 혐오하는 생각이 짙게 깔려있었다. 게다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3500명의 군인은 징집이 아닌 모두 자원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비난 여론이 일었던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은 네덜란드에 3,500명의 병력을 요청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 재건으로 보낼 수 있는 형편이 안되었고, 네덜란드 국법상 징집병은 해외 파병을 못 보내게 되어 있었다. 처음엔 600명만을 보냈는데, 계속 요청을 거절한 네덜란드 정부에 화나 난 미국 정부는 원조를 끊겠다는 통보를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원자로 이루어진 3500여 명의 병력을 모을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미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네덜란드 국민들은 전쟁을 잘 알기에 가고 싶지 않아 했고, 참전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귀환한 군인들에 대한 시선이 매우 좋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더라도 허먼 선생님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언제나 그의 군복에 한국전쟁 참전 기장을 달고 다녔다.
한국에서 돌아온 뒤 1달 동안의 휴가가 주어졌는데, 그동안 먹고 마시고 싶었던 것들을 즐기며 모든 돈을 탕진했다. 그토록 3년간의 세월이 길고, 힘든 일이 많았을 테니…
한 달의 꿈같은 휴가 후 군에 복귀하니 군에서는 장기복무할 지원자를 찾았는데, 돌아온 한국전쟁 참전군인 중 지원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유일한 지원자였고, Sergeant first class(하사)로 임관하여 20년간을 네덜란드 육군에서 근무했다.
여기에서도 슬픈 사연이 있는데, 하사로 임관하기 위해 군 학교에 들어갔을 때, 교수로 있던 한 대위가 가슴에 단 한국전 참전 기장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더니, 그런 것은 들은 바가 없다고 떼라고 했다고 한다.
진급한 뒤 다시 군 학교에 교육을 받으러 갔는데, 한 대령이 한국은 듣도 보도 못한 곳이라며 떼어 버릴 것을 강요했고 어쩔 수 없이 교육기간 동안은 달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네덜란드 군 행사에서 여왕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행사를 준비하던 장교가 오더니 또 한국전쟁 참전 기장이 군에서 허가되지 않는 것이라며 떼라고 했다.
Sergeant Major로 진급돼서 또 군 학교 기관에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 한국전쟁 참전 기장을 가지고, 그것을 붙이고서는 학교에 못 들어온다며 군 관계자들이 소리쳤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5년간 NATO군으로 독일지역에 근무하고, 네덜란드의 새로운 부대에 배치받았는데, 그의 부대 지휘관이 그것을 보며 당장 떼어버리라고 명령했다.
허먼 선생님은 한국전쟁에 다녀온 것이 숨길 이유도 없고 비난받을 일도 아닌데, 스스로 한국전쟁 참전 기장을 떼어 버리는 불명예스러운 일을 더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날로 군복을 벗고 군에서 나왔다고 한다.
네덜란드 군에서도 이런 인식이었으니, 네덜란드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안 봐도 뻔하지 않은가!
네덜란드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명예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장면.
여전히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본인에게 이런 영광을 준 나를 비롯한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말씀하셨다."
....
이해가 안되지? 위에 말한것처럼 냉전의 시각이 아니더라도, 북한이 먼저 침공한게 맞고
. 국가가 결정해서 유엔군의 일원으로 가서 정정당당하고 용감하게 싸우다 온 군인에게 도대체 왜 저런 취급을 했을까?
네덜란드가 친공산주의적이었냐면 그것도 아니고. 베트남전처럼 매체에서 미군의 잘못을 때려댔던 것도 아니었지.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 중에서는 양민학살 사례가 있긴 했는데. 네덜란드나 기타 국가들은 그런것도 지금까지 없는 걸로 알고 있어. 당시에도, 지금도 부정적으로 볼할만한 부분 자체가 없었지.
게다가 한국 위키백과의 이 부분은 헤르만 선생님이 겪으신 현실과 정반대거든. 위키가 공신력이 낮긴 하지만. 이런 공식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크게 어긋날게 없....는데 말이지.
"네덜란드는 다른 유엔참전국과는 달리 민간단체에서 자발적으로 참전을 촉구하여 파병을 결정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국내외의 군사적인 사정으로 지상군의 파병이 불가한 형편이었으나, 많은 국민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참전을 촉구하고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파병이 가능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국민이 보여준 용감성과 자유수호에 대한 의지는 대한민국이 존립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고, 자유세계를 결속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53년 10월 1일 네덜란드대대는 그간의 전공으로 인해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 이에 앞서 대대는 횡성-원주전투에서 세운 전공을 높이 치하하는 미국 대통령의 부대표창을 1951년 8월 9일 밴 플리트 대장으로부터 수여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네덜란드대대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기간 동안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비롯한 3회 부대표창과 156회의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네덜란드정부의 The Cross for Justice and Freedom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이 모순이 궁금해서 찾다보니
닐스 미스터버리란 사람의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학 석사학위 논문 「네덜란드의 한국 전쟁 참전에 대한 연구」가 나오더라고.
역시 문제는 헤르만 선생님도 미국도 아니였음.
네덜란드(정부와 국민들)이 엄청나게 참전하기 싫었던 전쟁이었고. 알고 싶어하지 않던 전쟁이었다는게 문제...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네덜란드는 19세기의 자유주의적 전통과 20세기 초의 자유주의-사회주의-기독교 보수세력간의 균형을 이룬 이후 중립국의 전통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국가의 정체성을 `자유주의적 중립주의`란 키워드로 봐야한다고..
물론 1차대전과 2차대전때 중립을 지키다가. 2차 대전 당시 본토는 나치 독일에게 4일만에 털리고, 식민지는 일본에게 반띵을 당했더라도.
사람... 아니 나라는 쉽게 바뀌지 않지.
미-소 양대축의 냉전과 한국전에서 네덜란드는 최대한 발을 뺴고 싶어했음. 하지만 큰 형님인 미국이 하라는 대로 했지.
네덜란드의 참전 동기는 대충 4가지였다고 저 논문에선 보더라고.
1. 우리가 원래 국제법 좀 좋아해 . (근데 유엔때문에 우리가 인도네시아 잃었는데 ㅅㅂ...(네덜란드 국회 회의록에 의원 발언으로 남아있음) )
2. 마셜 계획의 혜택과 나토의 지원을 받는 수혜자로서, 동북아에서 미국이 손뗴면 유럽도 그 꼴 날때 찍소리 못한다는걸 꺠달음.
3. 다른 나토 국가(영국이라던가) 들과의 으리 ( 그건 겉으로 내세운거고. 당시 미국이 정색하면서 툭툭 치는 거 감당못했다는게 정설...)
4. 네덜란드의 아시아지역 국익.
그 결과 네덜란드의 한국전 참전과 이후 군사적 결정에는 `마지못해`란 말이 매번 빠지지 않음.
특히 4번이 중요한데.
유엔(과 미국)은 네덜란드의 2차대전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 (인도네시아)를 토해내라고 뒷통수를 쳤지만,
네덜란드는 상당부분 아직 입에 남겨둔게 있었음. 마침 장개석을 대만으로 쫓아낸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보니,
얘들이랑 수틀리면 잘못하다가 얹혀서 체한다는 생각이 들었나봄. 하지만 또 중공이 북한을 먹으면 인도네시아를 적화시킬 거란 상상을 하게됨.
여기선 중립국으로 귀여운 네덜란드짱이 중공과 이야기를 잘하면 잘 구슬릴수 있을거란 (헛된) 희망을 품고,
미국이 7함대를 대만에 파견을 반대하다가. 또 저기 끌려가서 개갈굼 당하고 시무룩해졌음.
미국 입장에서는 .... 지금도 그렇지만, 2차 대전후이니 유럽에 비해 독보적인 군사력이라.
다른 국가의 실질적인 도움은 필요 없지만, 유엔군 형식으로 한국을 도우기 때문에 다른 국가의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고, 강요했음.
네덜란드는 그게 무지 싫었나봄. 인도적으로 구급차만 파견하면 안될까 하다가, 미국이 정색하고 전투병 내놓으라고 갈굼.
네달란드내에서 `히잉, 우리 아직 군사력 약하지 않냐?` 란 이야기도 나오다가.
`유럽이 자유진영의 다른 국가를 지원 하지 않으면 서유럽에 전쟁이 생길 경우에 미국이 서유럽을 왜 지원할까?` 란 내부 의견이 승리함.
네덜란드가 큰 맘먹고 해군 중대와 육군 중대 각각 하나씩 파병한다고 언론 발표함.
미 국무부에서 바로 헤이그에 전보 때림 ` ㅈㄲ. 1개 대대 아니면 1000명 단위 아니면 안받는다`
결국 자원병 형식으로 보병대대 병력 : 819명 과 구축함 한척으로 연인원(5,322) 파병을 했지.
네덜란드는 유엔군이 38선을 넘는 문제도 영국과 함께 미온적이었음. `3차대전 나면 우리 소련에게 관광당....` `지금 뭐랬냐 동.맹.국.아?``
논문에서도 상당히 시니컬하게 나와있었음..
""중국 문제에 대한 네덜란드의 시각은 네덜란드가 미국에게무조건적인 동맹국이 아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네덜란드는 미국에게
외교정치에 대한 네덜란드의 시각을 꾸준히 설득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네덜란드가 거의 항상 미국 요청에 굴하는 것이었다. "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상실이 1 년도 안 되었고, 네덜란드가 자신을 100 년 넘게 국제법질서의 보호자로 인식하였으며, 상대적으로 부유한 서유럽 나라였다. 하지만 미국과 아마 다른 나라에게는 네덜란드가 더 이상 중간 국가 아니었다. 네덜란드는 특히 군사적으로 20 세기에 도대체 중간 국가였을까? 아니었다고 하고 싶다. 네덜란드는 소극적 중립주의 정책의 전통 때문에 20 세기의 무력 정치의 진실과 접촉하지 않았다. 2 차 세계대전 후의 국제 질서의 야망은 보편적이었어도 냉전은 이 시기를 무력 정치의 시기로 만들었다. 특히 한국 전쟁 같은 충돌에 소약국 이상주의가 표면 외에 자리가 없었다. 네덜란드는 한국전쟁을 통하여 이 진실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지위가 예전과 상당히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받아들이는 것이 몇년 더 걸렸다"
닐스 미스터버리, 「네덜란드의 한국 전쟁 참전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학 석사학위 논문, (2016년 1월)중.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왜 그렇게 한국전 참전 용사를 부정하고 싶어했는지는 짐작은 감.
파병된 군인들은 용감하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서 싸웠지만. 정부와 국민들은 그러고 싶지 않았었고,
자국 정부와 자신들의 삶에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고 느꼈던거지.
어쨌건 네덜란드의 참전 결정은 공식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고, 우리 정부도 감사하고 있으니 지금은 다행이지만....
라미현 작가의 글에서 헤르만 선생님은 고국으로 받았던 설움도 다 잊으셨다고 하니 정말 다행인듯.
10여 년 전부터 네덜란드 국방부에서는 ‘한국에 가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방문할 의향이 있냐’고 물어봤지만, 그는 매번 싫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보는 국방부에, ‘한국 그냥 싫어. 안가! 안가!’ 하고 화까지 냈다.
그렇게 수십 번의 회유와 부탁에도 완고했던 그가 2017년 한국에 방문했던 이유는 아들 때문이었다. 아들이 아버지가 참전했던 한국이라는 나라를 궁금해했던 것이다.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그 한마디에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한국 땅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정말 여기가 내가 왔던 한국이 맞나’ 하는 생각과 함께 현기증까지 나면서,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했다고 한다. 분명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에, 굶주리고 있던 한국인들이었는데..
더 좋아했던 것은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참전 희생으로 대한민국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고마워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만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으니, 네덜란드에서 그런 대접을 받는 아버지를 보며 울었다고 한다. 허먼 선생님의 마음속 깊이 있던 상처는 치유되고, 숨어있던 명예와 자부심이 올라왔다.
개드립 - 한국전 참전 용사의 명예 자체를 공식적으로 꾸준히 부정하려던 국가 ( https://www.dogdrip.net/351593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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