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생각보다 좀 더 짜증나는 사람이, 고려대대나무숲

 

 

 


 

 

#36420번째포효

당신은 생각보다 좀 더 짜증나는 사람이다. 얼굴은 내 스타일이 아니고, 키도 엄청 크지 않고, 뭐 엄청난 센스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내 주변을 계속 맴도는지 이해가 안된다. 굳이 장점을 꼽자면 어떻게 자기랑 그렇게 잘 어울리는 옷들만 찰떡같이 골라와 입고 다니는지, 향수는 도대체 뭘 쓰길래 날 지나칠 때마다 궁금하게 만드는지.

인사성은 왜 또 그렇게 좋을까? 우리보다 어려 보이든, 비슷한 또래로 보이든, 뭐 어른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꼬박꼬박 선생님이라는 극존칭을 붙여가며 부탁하는 말투는 어디서 배워온건지. 편의점이든 카페든 나올 때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수고하세요 의 완벽한 삼박자. 난 널 보면서 ‘이 사람은 납치를 당하더라도 풀려날 때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교도소에서 수고하세요’ 라고 할 위인일거라 생각했다.

남의 일에 침묵하는 법은 또 어디서 배운걸까?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주변 연인들을 부러워하고 걱정할 때 당신은 아무 말 안하고 노래를 듣거나 핸드폰만 쳐다봤다. 내가 가족 문제로 힘들어할 때 당신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조차 아무 말 안하고 고개만 끄덕이던 당신이 너무 답답해 뭐라도 말해보라 했다. 당신은 여러 생각이 들지만 네 가족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다며,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았냐 되려 반문했다. 아, 또 당신에게 설득당했었다. 답답해서 응어리진 마음은 어느새 풀려있었다.

반면 당신의 얘기를 할 땐 눈이 반짝반짝 빛나다 못해 요새 보이지 않는 별들이 다 당신 눈으로 도망쳐왔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좋아하는 영화는 뭔지, 바닐라맛과 초코맛 아이스크림을 섞어 먹지 않는 건 범죄라느니, 또 좋아하는 책은 뭔지, 계란찜을 식혀먹는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느니. 실없는 소리 같다가도 어느새 진지한 얘기를 늘어놓는 당신을 보면 참, 말이 많은 사람이구나 싶다. 어쩜 아무렇지 않은 무료한 일을 그렇게 신나고 재치있게 말하는걸까.

사람 마음에 훅 들어왔다 나가는건 어디서 배운걸까? 문득 새벽에 전화를 걸어 이 노래를 아냐며 블루투스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려주거나, 어중간한 여름과 가을 사이에 서있었을 땐 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커피를 하나씩 사와 마시고 싶은걸 고르라거나, 술을 마시러 가면 취한게 빤히 보이는데도 내 물컵에 물이 비면 누가 뺏으러 오는마냥 허겁지겁 채워주거나. 아니, 도대체 사귀자는 말을 안 할거면 왜 카톡하다가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목소리가 듣고 싶다 하는걸까? 타고난건지, 배운건지. 어느 쪽이든 당신은 참 대단한 사람이다. 짜증나게 목소리는 왜 은근슬쩍 좋은건지.

생각해보니 우물쭈물 망설이며 고백하지 못하는 당신이 너무 짜증난다. 더 짜증나 홧병이 도지기 전에 얼른 내가 고백해야겠다. 또 생각해보니 누가 당신을 채간다면 내가 더 짜증날 것 같아 얼른 고백하는게 맞는 것 같다. 아, 전에 보니 운동이라도 하는 듯 어깨가 좀 넓어졌던데, 팔짱을 낄까 어깨에 기댈까. 여름은 좀 남았는데 벌써부터 당신 때문에 더워진다.

 


 

출처

https://www.facebook.com/koreabamboo/posts/779936702209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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